사무자동화 연구소 우수사원 "우쯔"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은 유럽에서 나치즘이 극성을 부리던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쓰여진 책이다. 전체주의가 세계를 장악하던 때, 문명사회의 희망을 밝히는 한 권의 위대한 책이 출현한 것이다. 이 책은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알려 민주사회가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이에크가 이 책을 쓰던 1940년대 당시는 사회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득세하던 시대였다. 그럴듯한 목표를 내세워 국민을 현혹하고 경제를 조정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려던 시도들은 결국 독일의 나치, 소련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임이 여실히 나타나고 많은 이들이 이로인해 고통받았다. 사회주의가 전체주의로 가는 위험한 통로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바로 자유의 길이 아닌 독재와 노예의 길이었다.

 

하이에크는 이 책의 시작을 통해 이거은 정치서적임을 알려주면서, “다른 속뜻이 있는 아마추어와 가짜 만병통치약을 팔려는 돌팔이들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고 있고, 이에 따른 위험수위가 너무 높아져 여론에 경고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며 사회주의자에 대한 경고로서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중앙 집권적 계획이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하이에크의 경고는 그가 농노로 가는 길에서 한 유일한 경고는 아니지만 개념적으로 뚜렷한 주장들은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하이에크은 기업의 개입이 더 이상의 개입을 유발하여 궁극적으로 더 이상의 생산적인 개입을 억제하고 따라서 생산적인 시장 개입을 억제하는 왜곡을 초래하기 때문에 의도되지 않은 경제 개입 정책이 위험한다는 주장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그것은 어떻게 실제로 의도하지 않고 중심적인 계획에 비틀거리며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쟁이다. 하이에크는 그 주장을 분명히 믿었고, 자유와 민주주의와의 모순에 대한 그의 주요한 계획에 대한 그의 주장과 함께 또는 그의 보충 물로 종종 언급했다.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추가 개입을 하라는 압력을 만들어 내기 위한 개입의 거부할 수 없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하이에크는 그러한 경향의 힘을 분명하게 과대 평가했고, 이해하지 않았으며, 최소한 정치적 대항력에 대한 저항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 했다. 따라서 하이에크이 "아주 많은 개입과 더 이상의 하락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적 원칙이 옳았지만, 여전히 새로운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는 범위를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일종의 민주주의적 평형이 있다. 그것은 분명 하이에크의 너무 좁고, 지나치게 비판적인, 민주적인 정치적 절차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견해에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집단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이 사회의 노력을 동원하여 달성하려는 목적들의 성질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사회 전체와 사회의 모든 자원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조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개인들의 목적이 최고로 존중되는 독립적 영역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와 다르다.”

하이에크는 집단주의, 공산주의, 파시즘과 같은 사상들은 한마디로 전체주의적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기술발전이 독점을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기술이 발전하면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계획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개인의 자유를 사회적 목표에 맞춰 통제하겠다는 것이 바로 계획주의 경제의 내용이다. 사회주의는 독점 현상을 기반으로 계획경제의 불가피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독점현상은 기술발전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독점을 유도하는 정부정책에 의해 보통 일어난다. 부가 규제나 법률로 독점을 허용한 분야에서 독점은 대부분 생겨나고 유지된다.

 

사회적으로 계획과 통제를 채택하게 되면 각자의 목표들 사이에 잠복해 있던 갈등은 심화되고 노출되게 된다. 계획주의가 가져올 폐해를 걱정한 하이에크는 “무엇보다도 시골의 전통적 모습을 보존해야 하며, 그 본연의 아름다움에 산업화가 묻힌 때를 제거하여야 한다는 전원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목가적이지만 비위생적인 오래된 오두막들은 모두 철거되어야 한다는 건강 광신자들, 혹은 거대한 자동차도로를 내기 위해 시골이 잘려지기를 바라는 자동차광들, 혹은 전문화와 기계화가 최대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능률 광신자들, 혹은 개성의 개발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수의 독립적 기능공들을 보존하기 바라는 이상주의자들, 이들은 모두 그 누구 못지않게 오로지 계획에 의해서만 그들의 목표가 완전히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이런 말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계획을 원하게 된다고 말한다.

 

사회목적이라는 개인의 목적을 모두 모아서 하나의 사회의 목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어떠한 조직에서도 합의된 영역 외에서는 어떤 최고의 선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공통되는 가치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전체의 필요들 가운데 일부분 이상 이것들을 안고 가기는 어렵다. 그 영역 밖에 나가면 더 이상 최고의 선이 아닌 것이다. 국가가 자신의 밖을 통제한다는 것이 결국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게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자유는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 그 이상일 것이다. 뛰어난 통제성과를 얻기 위해 자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최고로 가치 있는 대상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자유가 있어야 하는것이 아닐까?

 

사회주의 가치를 위해 경제의 자유를 억압하더라도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경제 문제로 한정해서 통제를 가하면, 계획사회에서도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치적 독재를 거부했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주장에 동조해 경제 분야의 통제를 지지하곤 했다.

 

일단 경제 분야에서 계획주의 방식으로 모든 생산과 소비에 대한 통제가 진행되고 각 개인의 직업과 위치 등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단계에 이르면 이는 개인의 자유를 아주 작게 약소화시킬 것이다. 경제적 자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국민정서가 만들어지면 정부는 경제적 통제를 심화할 수 있게 된다. 시장의 가격기능은 정부의 명령과 금지로 바뀔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강한 자들의 선처에 의지해야 하는 노예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정치 분야에서도 통제와 독재가 반드시 행해진다.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에서 핵심을 인용하면

 

 

중요한 점은, 우리가 관점이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지금 어떤 면에서는 모든 사회 주의자들과 같은 이 나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모두 사회 주의자다"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더 이상 유행이 아니며, 이것은 단지 사실이 너무 명백해서 그렇다. 우리가 계속해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성공한 정치가는 자신이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고 체계 내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에 힘을 얻었다. 정치가가 사상 분야에서 지도자가 되는 것은 거의 모순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그의 과제는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견을 파악하는 것이며, 먼 미래에 대다수의 견해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의견을 유포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통제는 단지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인간의 삶의 부분에 대한 통제가 아니다;그것은 우리의 모든 목적을 위한 수단의 통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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